낮은 자존감이 신앙에 미치는 영향과 치유방안 1. 박노권 (목원대학교 실천신학 교수)
얼마전 한 교인과의 대화 속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마음으로 믿고 고백했으며 교회에서 많은 봉사와 활동을 하고 있음에도 여전히 여러 가지 죄책감으로 괴로워하고 겸손을 가장한 자기 비하로 힘들어하고 있는 모습을 보았다. 그는 이것을 단지 자신의 신앙심이 부족하기 때문에 그런 것으로 이해하고 자신 안에 그러한 모습이 보여질수록 더욱더 자신을 질책하기도 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문제가 해결이 되지 않아 고민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한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많은 사람들에게서 나타나는 현상으로, 심리학적으로 볼 때 그 원인이 대부분 낮은 자존감에 뿌리를 둠을 볼 수가 있다. 낮은 자존감을 가진 사람들은 회심의 체험도 있고, 복음에 대해 잘 알고 있으면서도 여전히 잦은 죄책감과 우울증, 열등감 등의 문제로 고민하게 된다. 성숙한 삶에 관한 책도 읽고, 부흥회에 참석도 해보고, 더 깊은 헌신을 위해 기도를 하고 성경을 보고 열심히 노력하기도 하지만 여전히 그들 내면에서 들리는 "좀 더 잘해봐, 아직 충분치 않아"라는 음성 때문에 영적인 좌절을 맛보고 절망에 빠지기도 한다.
기독교인의 삶 속에서 무엇보다 낮은 자존감이 이와 같이 신앙생활에 큰 영향을 미치고 있는 것을 보면서, 보이슨이 시도했던 것처럼 오늘날 기독교인의 삶에서 단지 명제적인 교리가 아니고, 실제의 삶에서 구원의 기쁨을 얻는 것이 중요하다는 신학적 관점에서 이 문제를 풀어보고자 한다. 이를 위해 본 글에서는 자존감에 대한 분석을 하고 낮은 자존감이 어떻게 신앙에 영향을 주는지를 살펴보고, 자존감 회복을 위해서 상담학적 측면에서 어떻게 접근할 수 있는지를 제시해 보고자 한다.
1. 자존감 개념의 기원
1970년대부터 기독교 상담학이 활발해 지면서 기독교 안에서 '자기사랑'이나 '자기존중'에 대한 언급이 많아지기 시작했다. 그러나 엄밀히 말해 '자기사랑'이나 '자기존중'에 대한 것은 1940년대부터 일반 심리학에서 이미 중요한 주제가 되어있었고, 50년대와 60년대에 이르러 그 전성기를 맞이했다. 그리고 이것이 다시 기독교 상담이나 돌봄 분야에 영향을 주게 된 것으로 볼 수 있다. 따라서 자존감의 개념을 정리하기 위하여 먼저 이것에 대한 인식을 새롭게 한 실존주의-인본주의 심리학의 영향을 살펴보고, 더 깊이 올라가서 이러한 개념들에 대한 성서적인 근거를 찾아보고자 한다.
실존주의-인본주의 상담방법은 참 인간이 된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가 하는 철학적 관심에 강조 점을 두고 있다. 실존주의-인본주의 심리학자들은 인간은 자유와 책임에서 도피할 수 없으며 인간의 자유는 인간의 책임과 함께 한다는 대전제를 갖고 있다. 마슬로우(A. Maslow)는 "사람들은 정치적 민주주의나 경제적 번영이 그 자체로는 가치 문제의 그 어떤 것도 해결해 주지 못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가치가 자리잡을 곳은 인간의 내부와 자기 자신뿐, 그밖에는 아무 곳도 없다"고 말하며 개인의 중요성에 대한 실존주의의 영향을 말하고 있다. 이와 같이 실존주의는 어느 사상보다 개인의 개별성과 주관성을 강조하며, 우리 모두가 무한한 가능성을 가지고 있으며, 그 자신이 가치와 의미의 창조자임을 강조하고 있다. 이 사상은 인간을 더 이상 유전과 환경에 의해서 조정되는 생물학상의 기계가 아닌, 최소한 인간 스스로의 판단으로 선택의 자유와 절대 가치를 지니는 인격체로 보게 해 주었다.
이러한 실존주의-인본주의 심리학의 자아실현, 자기배려, 자기존중에 대한 주장은 더욱 효과적으로 기독교의 전통적인 이웃 사랑을 이해할 수 있는 새로운 관점을 제시했다. 이 분야의 대표적인 학자중 하나인 로저스는 개인들을 "피상적이고 외적인 근거에서 바라볼 때 그들은 우선적으로 자아사랑의 희생자인 것으로 보인다"고 말하면서, 자기가 치료했던 수많은 사람들을 근거로 해서 "문제의 핵심적 원인은...그들이 그들 자신들을 경멸하고, 자신들을 무가치하고 사랑 받을 수 없는 것으로 간주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여기에서 다른 인본주의 심리학자들의 입장도 비슷하다. 인간 실존에서 심각한 문제는 '자기사랑'이 아니라 '자기혐오'이며, 사람이 자기사랑을 느끼면(자아가 사랑 받고 또 사랑받을만하다고 느끼면) 자동적으로 타인 사랑이 뒤따를 것이라는 것이다. 물론 신학에서도 자기존중을 할 수 있도록 힘을 주는 하나님의 은혜에 대해 말을 하지만, 구체적으로 인간 조건의 분석에 있어서 자기혐오나 자기존중의 상실 문제에 대해서는 심리학이 신학자들보다 더욱 많은 것을 우리에게 말해주고 있다. 바로 여기에서 자기존중에 대한 심리학의 통찰력이 오늘날 기독교 상담과 돌봄에서 말하는 자존감에 대해 많은 영향을 주게 된 것이다.
위에서 살펴본 자존감의 철학적, 심리학적 배경은 인간의 자아를 그 존재의 근원에 놓고 있다. 또한 이 자아 자체가 선하고 사랑 받을 만하고 그러기에 무조건적 존중이 필요하다 주장하고 있다. 그러면 과연 인간은 그 본성 자체가 선하고 아름답기 때문에 존중을 받아야 하는 것인가? 자존감의 근거에 대해 성서는 무엇이라고 말하고 있는가? 그 동안 심리학의 영향으로 기독교 안에서 자존감에 대한 새로운 인식이 생기고 강조를 하게 되었지만, 이미 이것은 성서 안에서 그 근거를 발견할 수 있으며, 심리학적인 자존감 이해를 더욱 풍요롭게 만들어 줄 수 있다고 본다.
자존감의 근거에 대한 성서적 배경을 살펴보고자 할 때, 가장 중요한 것은 인간 본성에 대해 바른 이해를 갖는 것이다. 기본적으로 성서의 인간이해는 프로이드의 부정적 인간이해에 동의하는 것처럼 보인다. 성서도 "내가 죄악 중에 출생하였음이여 모친이 죄중에 나를 잉태하였나이다(시51:5)," "사람의 마음의 계획하는 바가 어려서부터 악함이라(창8:21)," "기록된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다 치우쳐 한 가지로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롬3:10-12)"라고 표현하고 있다.
그러나 성서는 인간의 완악함과 죄성을 깊이 인식하면서도 "하나님의 형상"과 "구속"에 대한 교리를 말하고 있다. 하나님의 형상(창1:27)에 대한 학자들의 해석이 분분하지만 대부분 일치를 보고 있는 것은 "하나님과의 인격적 교제를 나눌 수 있는 존재로의 지으심"과 "통치권의 위임"(창1:28을 근거)이다. 인간의 타락으로 비록 이 하나님의 형상이 손상을 입은 것은 사실이지만 신약성경은 하나님의 아들이 친히 인간들을 찾아와서 인간들을 위하여 십자가에 죽으실만큼 인간에게는 아직도 무한한 가치가 있다는 사실을 선포하고 있다. 성서가 말하는 자존감의 근거가 바로 여기에 있다. 이와 같이 성서는 로저스가 말하는 것처럼 인간 안에 자기실현 가능성이 있고 본래적으로 선한 존재이기에 존중을 받아야 한다고 말하지 않는다. 본래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인간의 본성이 죄로 인해 타락하고 병들어 있지만 여전히 하나님이 가치 있게 여겨 사랑하시고 구속하시기에 존귀하다는 것이다.
성경 안에서 자존감의 근거를 제시하는 구절로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마22:29)를 들 수 있는데, 트로비쉬(W. Trobisch)는 "결코 자기 자신을 사랑하라는 명령 없이 이웃만을 사랑하라는 명령이 내려지지는 않는다"고 말하며 여기에 자기사랑의 전제가 깔려있다고 말하고 있다. 더나아가서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태도, 즉 하나님이 우리를 바라보시는 관점으로 우리 자신을 보는 것이 자존감의 근거가 될 수 있다. "내가 너를 보배롭고 존귀하게 여겨 너를 사랑하였은즉"(사43:4)이라는 성경 구절은 죄악 가운데 있는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태도를 보여주고 있다. 그러므로 '지금 우리 자신이 어떠한가'보다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나를 어떻게 보시는가'라고 할 수 있으며, 이러한 의미에서 성서적인 자존감은 하나님의 은혜에 초점을 두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이는 우리 자신을 다른 사람과 비교하는 상대적인 가치감으로 평가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보시는 관점과 그분 안에서 갖게 된 절대적인 가치감으로 평가해야 함을 말해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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