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11/2010

평신도를 위한 성경읽기

흔히 구약은 어렵다고 하고, 아무리 읽어도 무슨 말인지 이해할 수 없다고 합니다. 구약 전체를 통독한 교인들도 도대체 무슨 내용인지 잘 모르겠다고 합니다. 구약은 워낙 방대하기 때문에 구약의 일관된 주제를 찾아낸다는 것은 어려운 일입니다. 그래서 구약을 읽을 때는 전체적인 흐름과 맥을 짚어내는 것이 중요합니다. 다음의 글은 제가 쓴 ‘구약문지방넘기’의 내용과 겹치지 않도록 썼으므로 비교하면서 읽어보면 좋을 듯합니다.  (오정윤 목사님)

소낙비와 향기 - ‘쏟아지는 것’과 ‘피어오르는 것
  구약 39권에는 두 개의 흐름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일과 사람의 일이 그것입니다. 하나님의 일은 무엇일까요? 하나님께서 인간에는 들려주시는 말씀, 하나님께서 인간을 위해서 베푸신 일들입니다. 하나님의 일은 창조와 구원이고, 은총과 자비와 긍휼입니다. 인간의 일은 무엇일까요? 하나님의 일에 대한 인간의 반응입니다. 감사와 찬양과 기도가 바로 그것입니다. 저는 두 개의 흐름을 ‘쏟아지는 것’과 ‘피어오르는 것이라고 표현하고 싶습니다.

  하나님의 일은 ‘쏟아지는 것’입니다. ‘내 교훈은 비처럼 내리고 내 말은 이슬처럼 맺히나니 연한 풀 위의 가는 비 같고 채소 위의 단비 같도다(신명기 32:2)’ 여기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비와 이슬과 단비’로 비유하고 있습니다. 모두 하늘에서 쏟아지는 것입니다. 소낙비가 하늘에서 쏟아지듯이 하나님의 말씀도 하늘에서 쏟아집니다.

  인간의 일은 ‘피어오르는 것’입니다. ‘제사장은 그 전부를 제단 위에서 불살라 번제를 드릴지니 이는 화제라 여호와께 향기로운 냄새니라(레위기 1:9)’ 제물을 불살라 바치면 그 냄새가 하늘로 피어오르고 하나님께서는 제물의 냄새를 맡으시고 기뻐하십니다. 제물의 냄새가 하늘로 피어오르듯 인간이 바치는 기도와 감사와 찬양도 하늘로 피어오릅니다. 소낙비처럼 쏟아지는 ‘하나님의 은총’, 그리고 제물의 냄새처럼 피어오르는 ‘백성의 감사’, 이 두 가지가 청실홍실처럼 엮어져서 이루어진 게 바로 구약입니다.

히브리어 성경에서는 구약을 율법(토라), 예언서, 성문서로 구분합니다. 이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제가 쓴 ‘구약문지방넘기’를 참고하십시오. 율법과 예언서와 성문서는 ‘쏟아지는 것’과 ‘피어오르는 것’ 중에 어디에 해당할까요? 율법은 하나님께서 인간들에게 주시는 가르침이기 때문에 ‘쏟아지는 것’이고, 예언서도 하나님의 말씀을 예언자가 대신 전하는 내용이기 때문에 역시 ‘쏟아지는 것’입니다. 거기에 비해서 성문서는 주로 하나님의 은총에 대한 백성의 응답과 반응이 들어 있기 때문에 ‘피어오르는 것’이 됩니다.

모세 오경 - 이야기체와 율법체

구약의 첫 번째 다섯 권의 책을 <모세 오경> 혹은 <토라>라고 부릅니다. <토라>는 좁은 의미로는 율법 조항을 가리키지만 넓은 의미로는 하나님의 백성이 살아갈 길 전체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모세 오경에는 두 가지의 문체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이야기체와 율법체입니다. 율법체는 ‘-해라, 하지 마라.’라는 식으로 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십계명이 대표적인 율법체입니다. 그 외에도 계약법전, 성결법전, 신명기 법전 등이 있습니다. 그다음에 이야기체가 있습니다. 이것은 옛날이야기 하듯이 인물이나 사건을 풀어나가는 형식입니다. ‘- 했느니라’라는 식이지요. 모세 오경은 율법체와 이야기체가 고루고루 섞어져 있습니다. 율법체는 ‘이렇게 살아라.’를 가르쳐 주고, 이야기체는 ‘이렇게 살았다.’를 가르쳐 줍니다. 따라서 여러분이 모세 오경을 읽을 때 이야기체는 ‘그분들이 어떻게 살았나?’를 살피면서 읽어야 하고, 율법체는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하나?’를 염두에 두고 읽어야 합니다.

이야기가 어떻게 율법이 되나요?

창세기는 율법체가 하나도 없고 전부 이야기체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특히 이스라엘 족장들인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이야기가 핵심 내용을 이루고 있습니다. 이런 이야기들을 어떻게 율법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제가 어렸을 때 종종 밤중에 똥을 누러 갈 때가 있었습니다. 그러면 식구들이 “똥 누고 올 때 닭장 앞에 가서 절하고 와라.” 그러면서 놀려대었습니다. 저는 곧이곧대로 닭장 앞에 가서 “안녕하세요?” 하고 착실하게 인사를 올렸습니다. 그러면서도 왜 그래야 하는지 그 이유를 몰랐습니다.

  닭은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아무 때나 닭기똥을 찍찍 갈깁니다. 그러니까 아무 때나 똥 누러 가는 사람은 닭만도 못하니 닭한테 인사를 하라는 뜻입니다. 우리 조상은 이래라저래라 하고 직접적으로 훈계하기보다는 이렇게 간접적으로 깨우쳐 주는 것을 좋아했습니다. “낮에 너무 많이 먹어서 밤에 똥 누러 가는 놈은 닭만도 못한 놈이야. 그러니 낮에 작작 먹어야지.” 이렇게 말씀하는 대신 “닭한테 인사해라” 하고 빙 돌려서 재미있게 가르쳐 주었습니다. 모세 오경에도 이렇게 빙 돌려서 가르치는 교훈이 많고, 이는 주로 이야기체에 많이 나옵니다.

  창세기에서 하나님은 이렇게 해라 저렇게 해라 말씀하시지 않고 다만 족장들이 살아간 이야기를 전해줄 뿐입니다. 아브라함의 예를 들어 보면 아브라함이 갈대아 우르를 떠나 가나안으로 들어간 이야기, 가는 곳마다 먼저 제단을 쌓고 하나님께 예배를 드린 이야기, 멜기세덱 제사장 앞에 십일조를 드린 이야기, 조카 롯을 위해 군사를 동원한 이야기 등등. 아브라함의 이야기는 ‘아브라함이 이렇게 살았다. 너희도 그렇게 살아라(혹은, 그렇게 살지 마라).’라는 뜻이 숨어 있습니다. 이야기 속에 율법과 가르침이 담겨 있습니다.

신명기의 구조 - 땅과 땅 사이에서

모세 오경의 마지막 책은 신명기입니다. 저는 신명기의 구조를 ‘땅과 땅 사이’라고 생각합니다. ‘죽음의 땅’과 ‘약속의 땅’ 사이에서 선포된 말씀이 바로 신명기입니다. 신명기는 모세가 선포한 세 편의 설교로 이루어져 있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입니다. 모세는 40년의 광야 생활을 다 마치고, 가나안 땅에 들어가기 직전에 모압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을 모아놓고 마지막으로 세 번에 걸쳐서 설교했습니다. 신명기는 광야와 가나안 땅 사이에서 선포된 말씀입니다. 광야는 죽음의 땅이고, 가나안은 약속의 땅입니다. 신명기는 죽음의 땅과 약속의 땅 사이에서 전해진 말씀입니다.

  ‘땅과 땅 사이’라는 개념을 가지고 신명기를 읽어 보면 신명기 전체의 틀이 눈에 확 들어옵니다. 모세가 전한 세 편의 설교 중에서 첫 번째 설교(1장-3장)는 광야 생활을 회고하는 내용인데, 이는 백성에게 ‘우리가 죽음의 땅에서 어떻게 살아남았는가?’ 하는 질문을 던지는 것이지요.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은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으로 죽음의 땅에서 살아남았다는 것입니다.

  두 번째 설교와 세 번째 설교(4장 이하)에서는 모세가 그동안 단편적으로 전해 주었던 율법을 총망라해서 종합적으로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모세는 ‘약속의 땅에서 어떻게 살아가야 할 것인가?’ 하는 질문을 백성에게 던져주고 있습니다. 그 대답은 ‘율법’입니다. 하나님의 율법을 잘 지켜서 거룩한 백성이 되어야 약속의 땅에 들어가서 잘 살고, 오랫동안 살 수 있다는 것입니다. 죽음의 땅에서 하나님의 명령에 불순종한 이들은 모두 멸망하고, 죽음을 면치 못했습니다. 마찬가지로 약속의 땅에서도 하나님의 율법에 불순종하면 멸망할 수밖에 없습니다.

  모세는 첫 번째 설교를 하면서 손을 높이 들어 백성이 40년 동안 지내왔던 죽음의 땅, 광야를 가리켰습니다. 죽음의 땅에서 우리를 살려주신 하나님을 기억하라는 것이지요. 두 번째와 세 번째 설교를 할 때는 손을 들어 저 강 건너 이스라엘 백성이 살아갈 약속의 땅, 가나안을 가리켰습니다. 약속의 땅에 들어가서도 하나님 한 분만 섬기며 살라는 뜻이지요.

신명기의 주제 - 토라와 땅

신명기의 두 가지 주제는 토라와 땅입니다. 율법을 히브리어로는 <토라>라고 합니다. 토라는 아주 중요한 말이니까 꼭 기억하십시오. 신명기에서는 토라를 규례, 법도, 명령, 증언 등 여러 가지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토라와 땅은 항상 같이 쓰입니다. 토라라는 말에는 땅이라는 말이 꼭 따라다닙니다. 신명기 본문을 직접 읽어 봅시다.

 이스라엘아. 이제 내가 너희에게 가르치는 <규례>와 <법도>를 듣고 준행하라. 그리하면 너희가 살 것이요 너희 조상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주시는 <땅>에 들어가서 그것을 얻게 되리라(4:1) 

이는 곧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가르치라고 명하신 <명령>과 <규례>와 <법도>라. 너희가 건너가서 차지할 <땅>에서 행할 것이니(6:1)

  여기에서 ‘명령, 규례, 법도’가 바로 토라입니다. 토라와 땅은 어떤 관계에 있는 것일까요? 토라를 지키면 복을 받게 됩니다. 율법 중의 율법이 <토라>이고, 복 중의 복이 바로 <땅>입니다. 그러니까 토라를 지키면 땅을 얻게 됩니다. ‘토라를 지키면 땅을 얻는다!’ 신명기 전체를 꿰뚫는 주제가 바로 이것입니다.

두 개의 역사서

  모세 오경에 이어서 역사서가 등장합니다. 여러분이 구약의 역사서 중에서 열왕기와 역대기를 읽다 보면 몹시 의아한 생각이 들게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열왕기와 역대기의 기록이 너무나 흡사하기 때문입니다. 둘 다 이스라엘 역대 왕들의 역사를 기록하고 있는데 내용이 아주 비슷합니다. 당연히 왜 똑같은 내용을 두 번씩이나 기록하고 있을까 하는 의문이 들 것입니다. 그러나 자세히 읽어 보면 열왕기와 역대기 사이에 차이가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구약에는 두 개의 역사서가 있습니다. <신명기 역사서>와 <역대기 역사서>입니다. ‘신명기 역사서’는 여호수아, 사사기, 사무엘상하, 열왕기상하 등은 가리키고, ‘역대기 역사서’는 역대기상하, 에스라, 느헤미야 등을 가리킵니다. 열왕기는 신명기 역사서에 속하고, 역대기는 역대기 역사서에 속합니다. 신명기 역사서와 역대기 역사서는 역사를 다루는 방식이 많이 다릅니다.

  우선 열왕기가 남 왕국과 북 왕국의 왕들을 모두 취급하는 반면에 역대기는 남 왕국의 왕들만 다루고 있습니다. 또한, 열왕기가 모든 왕을 골고루 다루지만, 역대기는 다윗과 솔로몬의 행적에 집중하고 있다는 점이 눈에 띕니다. 또한, 열왕기가 역대 왕들의 잘못을 드러내려고 애쓰지만, 역대기는 다윗과 솔로몬의 선한 면을 드러내려고 애쓰고 있습니다. 열왕기와 역대기는 똑같이 이스라엘 왕들의 역사를 다루고 있지만, 기록하는 방식에 차이가 있습니다. 왜 그럴까요?

역사서를 읽는 방법 - ‘질문과 대답’을 생각하며 읽으십시오.

  어떤 분이 역사란 현재와 과거의 대화라고 했습니다. 저는 이를 좀 더 확대해서 역사란 ‘현재의 질문과 과거의 대답’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두 역사서가 왜 그렇게 다를까 하는 문제는 바로 여기에서 비롯됩니다. 각각의 역사를 기록한 이들이 어떤 ‘현재’에서 질문하며 ‘과거’에서 어떤 대답을 들었는가 하는 것이지요. 여러분은 역사서를 읽을 때 이러한 질문과 대답이 무엇인지를 염두에 두고 읽어야 합니다.

  신명기 역사서는 바벨론 포로 생활을 하면서 허물어진 예루살렘 성전을 생각하면서 ‘어찌하여 이런 일이’라는 질문을 던졌고, 이에 대해서 ‘우리의 죄 때문에’라는 해답을 얻었습니다. 역대기 역사서는 지긋지긋한 포로 생활을 마치고 귀국하면서 ‘어찌해야 우리가’라는 질문을 품었고, 이에 대해서는 ‘다윗을 본받아서’라는 해답을 찾았습니다. 이런 질문과 대답을 생각하면서 구약의 역사서를 다시 한 번 읽어 보십시오. 새로운 세계가 펼쳐질 것입니다.

신명기 역사서의 배경 - 눈물이 강처럼 흐르던 날 

  예레미야 애가에서는 ‘눈물이 강처럼 흐르던 날(애 1:16, 2:18)’을 노래하고 있습니다. 그날이 언제였던가요? 바벨론 제국이 예루살렘을 멸망시키던 날입니다. 그날 바벨론 군대는 예루살렘 성전을 불태우고, 성벽을 허물어 버리고, 예루살렘 주민들을 죽이거나 포로로 끌고 갔습니다. 아, 생각만 해도 끔찍한 날입니다. 이 날은 이스라엘 역사상 가장 비극적인 날입니다. 이 날, 유다 백성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요? ‘우째 이런 일이! 어찌하여!’ 이 생각뿐이었을 겁니다. 어찌하여 하나님의 성전이 이방인에게 짓밟혔는가? 어찌하여 하나님의 백성이 이방인에게 살육당했는가? 어찌하여 다윗 왕조가 무너졌는가? 누구나 다 이런 의문을 품었을 것입니다.

  ‘어찌하여’! 이런 의문을 품고 기록한 역사가 바로 신명기 역사입니다. 신명기 역사는 ‘어찌하여’라는 질문에 대해서 ‘죄와 심판’이라는 답변을 들려줍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 앞에 죄를 지었기 때문에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서 예루살렘이 멸망한 것이라는 대답입니다. 예루살렘이 망한 것은 하나님의 능력이 부족하거나 하나님이 살아계시지 않기 때문이 아니라 백성의 죄 때문이라는 해석입니다.

역대기 역사서의 배경 - 아, 꿈이런가 

  ‘여호와께서 시온의 포로들을 돌려보내실 때에 우리는 꿈 꾸는 것 같았도다(시126:1)’ 시편 시인은 유다 백성이 바벨론 포로 생활을 마치고 고국으로 돌아오는 모습을 보고 마치 꿈을 꾸는 것만 같다고 말합니다. 고국으로 돌아오는 백성의 마음은 새로운 나라를 세우려는 희망으로 부풀어 있었습니다. 이들은 너나 할 것 없이 ‘어찌해야’라는 질문을 품고 있었습니다. 어찌해야 허물어진 성전을 회복할 수 있을까? 어찌해야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신앙생활을 할 수 있을까? 어찌해야 정의와 평화의 나라를 세울 수 있을까? ‘어찌해야’라는 질문에 대해서 역대기 역사서는 ‘다윗’이라는 해답을 던져 줍니다. 다윗을 본받아서 신앙생활을 하고 나라를 다시 일으키라는 것입니다. 다윗처럼 하나님을 섬기고, 다윗처럼 성전을 사모하고, 다윗처럼 하나님 앞에 겸손하게 신앙생활을 하면 된다는 것입니다.

반성의 역사와 본보기의 역사

  신명기 역사는 왜 하나님의 백성이 이방인에게 망했는가 하는 의문을 품고 역사를 되돌아 보았고, 백성이 하나님 앞에 죄를 지었기 때문이라는 결론을 얻었습니다. 그래서 신명기의 역사는 반성의 역사이고, 참회의 역사입니다. 반성의 역사에서는 이스라엘의 죄와 허물을 집중적으로 들추어 낼 수밖에 없습니다. ‘모든 것이 다 제 잘못입니다.’ 하고 가슴을 치고 통회하는 모습을 보여 줍니다.

  반면에 역대기 역사는 바벨론 포로 생활을 청산하고 귀향길에 오르는 백성이 어떻게 하면 새로운 나라를 세울 것인가 하는 의문에서 시작됩니다. 여기에는 온 백성이 우러러보고 신앙적으로 본받을 만한 역사적 인물이 필요했습니다. 그러기에 역대기 역사는 모범의 역사이고, 본보기의 역사입니다. 이 때문에 역대기 역사서에서는 다윗을 중심으로 역사가 엮어져 있습니다.

  물론 다윗이 모든 점에서 다 잘한 것은 아닙니다. 잘못한 것도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잘한 것이 훨씬 더 많습니다. 다윗 왕은 이스라엘의 역대 왕 중에서 가장 훌륭한 신앙생활을 한 왕입니다. 더군다나 다윗 왕은 예루살렘 성전을 짓는 데 지대한 공헌을 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본받아야 할 가장 모범적인 인물입니다. 역대기 역사서에서는 다윗 왕의 행적 중에서 잘못한 것이나 불미스러운 내용은 빼거나 덮어주고 대신 잘한 점만 크게 부각시키고 있습니다. 예를 들면 다윗의 최대 실수인 밧세바를 범한 사건도 빼어 버렸습니다. 대신 예루살렘 성전을 지으려고 준비한 일은 아주 자세하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포로 생활에서 돌아온 백성에게 다윗 왕을 본보기로 해서 신앙생활을 하게 하려는 의도에서 나온 것입니다. 그러므로 역대기 역사서는 이스라엘 민족의 ‘청사진’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쭉정이 농사와 씨나락

  열왕기를 읽다 보면 마치 농사를 다 지은 다음에 가을에 나락 공판장에서 벼를 등급 매기는 것과 같습니다. 나락 가마니를 쌓아놓고 1등급, 2등급, 3등급, 그리고 등외(等外)로 등급을 매깁니다. 이스라엘 왕들을 나락이라고 한다면 대체로 몇 등급이 많을까요? 안타깝게도 거의 다 등외를 맞았습니다. 농사를 지은 하나님의 심정이 어떠했을까요? 그 중 가장 잘 된 나락이 ‘다윗 왕’입니다. 등급으로 따지면 ‘특(혹은 특급)’입니다. 요시야 왕과 히스기야 왕도 꽤 괜찮게 맞았습니다. 그 나머지는 다 형편없습니다. 농사가 제대로 안 되면 농사꾼들은 ‘쭉정이 농사’를 지었다고 푸념을 합니다. 열왕기는 이스라엘 역사가 쭉정이 농사였음을 보여줍니다.

  역대기는 다음 해 농사를 준비하는 것과 같습니다. 농사를 지으려면 씨나락이 있어야 합니다. 씨나락은 농사지은 것 중에서 가장 좋은 것으로 준비합니다. 농사꾼은 이 씨나락을 목숨처럼 소중히 여깁니다. 오죽하면 ‘농사꾼은 굶어 죽어도 씨오쟁이는 베고 죽는다.’라고 하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준비한 씨나락은 다윗 왕입니다. 공판장에서 특급을 맞은 나락입니다. 이스라엘 역대 왕 중에서 가장 하나님의 마음에 드는 왕이 바로 다윗 왕이었습니다. 이 씨나락으로 내년 농사를 지으면 잘 될 것 같습니다. 역대기는 바로 다윗 왕이라는 씨나락으로 농사를 준비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올해는 농사를 망쳤지만, 내년에는 농사를 잘 지어야겠지요. 

한국 기독교 장로회 총회 회보 (기장 회보) 508호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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